꽁트-103 수도꼭지
황 영 찬
나도 나이가 들면서 대중목욕탕 가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만큼 즐거워할 일이 줄었다는 말이 될지, 아니면 내가 아는 어떤 이의 말대로 정상적인 발전을 해온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는 입버릇처럼 사람의 욕구는 식욕, 성욕, 명예욕, 권세욕의 차례로 충족되어야 하는데 마지막 단계가 목욕이라는 우수개 소리를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인데 그간에 무슨 반반한 감투 하나 써본 일이 없고 매스컴에 변변히 얼굴 한 번 내밀어 본 일도 없으니 명예욕과 권세욕은 그냥 뛰어 넘었거나 그게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욕망이어서 내 스스로 체념을 한 것 같다.
어떻든 시간 내기가 힘들어 그렇지 대중탕엘 가면 그저 마음 하나는 태평했다.
그래서 그날도 다른 일을 대충 정리해 놓고 곧장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탈의실을 거쳐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대강 온 몸에 물을 끼얹고서 온탕에 몸을 담갔다. 출구 쪽을 향해 앉아 몸 깊숙이 스며드는 열기를 즐기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아주 체구가 당당한 사람이 들어왔다. 옷을 벗어서 체구가 더욱 당당해 보이는 그 사람은 서로 인사는 없어도 알만한 얼굴이었다. 어느 교회의 집사쯤 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아는 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쪽에서 인사를 해오면 몰라도 나는 모른 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플라스틱 대야를 찾아들어 물을 떠서 좍좍 자기 몸에 끼얹었다. 물을 떠올릴 때부터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돌아가며 수도꼭지를 틀어놓았다. 그러자 목욕탕 안이 폭포처럼 물소리로 가득 찼다.
아마 차례로 온탕, 열탕, 냉탕에 들어갈 모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또 샤워기 꼭지를 틀고 그 밑에 버티고 서 있었다.
수고꼭지를 모두 틀어놓았기 때문에 각 탕마다 금방 물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만든 그는 잠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집사가 아니라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체하면 그만이지만 목사라서 그런지 자꾸 그리로 신경이 쓰였다. 우리 교회의 교인은 아니라도 그가 무슨 소리를 듣게 될 때 그것은 모든 교인이 싸잡아 욕을 먹는 결과가 될 게 빤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기 앞에서 몸을 씻느라고 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가 틀어놓은 수도꼭지를 차례로 잠그기 시작했다.
내가 냉탕, 온탕, 열탕의 수도꼭지를 다 잠그고 났을 때 그는 샤워를 끝내고 온탕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또 샤워기를 잠그지 않았다. 시작한 걸음이어서 내가 또 그것도 쫓아가서 잠갔다.
온탕에 들어가 있던 그는 불과 삼십 초도 되지 않아 거기서 나와 열탕으로 들어가며 또 열탕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너무 물이 뜨거워서 물속에 앉지도 못하고 잠시 서 있더니 훌쩍 냉탕으로 넘어갔다. 그는 또 냉탕의 수도꼭지를 열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바로 나와 다시 샤워기 앞으로 다가가 쏟아지는 물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아까 내가 수도꼭지를 잠갔으므로 이번에도 또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조금만 참으면 다른 사람이 나서서 잠그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이번에는 그 자신이 돌아와 잠그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차례로 돌아가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내가 참을성이 없는 탓이다.
이렇게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나는 그의 성질이 다혈질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작은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대범한 사람만 같게 여겨졌다. 두고 보아도 그가 하는 일은 똑 같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가 하는 대로 놔뒀다.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속으로 켕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뒤돌아서서 당신이 뭔데 내가 틀어놓는 수도꼭지를 잠그느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귀찮은 일이 벌이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난 목사인데 당신이 집사인 줄 알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내가 악의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이 인정될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내가 그런 생각마저 없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그가 하는 대로 구경만 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요란한 행진(?)은 끝이 났다. 아주 끝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당당한 체구를 플라스틱 목욕의자에 얹어놓았다.
그동안 불린 때를 씻어내려고 자리를 잡고 앉은 모양이다.
나도 그제야 안심이 되어 다시 온탕으로 들어가 스멀스멀 피부 깊숙이 파고드는 열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목사라고, 다른 교회 교인들까지 욕을 먹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썼던 게 우습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꼭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교인들 전체를 욕먹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렇게 조용히 목욕을 즐기다가 나는 문득 그의 일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슬그머니 그쪽을 넘겨다보았다.
혹 때밀이 수건으로 불린 때를 쓸어내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그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빨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혹시 결벽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가 수도꼭지를 틀어 탕 안의 물을 흘러넘치게 한 것은 물 표면에 둥둥 떠다니는 때를 제거하려는 의도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타월을 제 손으로 깨끗이 빨아 사용하려고 빨래를 하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더러더러 목욕탕에서 주는 수건을 제 손으로 깨끗이 빨아서 사용하는 사람을 보아온 터라 그도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가 목욕탕의 수건을 빨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동 같으면 집에서 가져온 타월일지라도 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로 다가가 슬쩍 그의 어깨를 넘겨다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금까지 그가 조용히 있었던 까닭은 양말을 빨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러닝셔츠, 팬티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독한 결벽증인가? 아니면 공처가인가?”
나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아까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수도꼭지를 잠그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말과 팬티를 빨고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 다니며 수고꼭지를 잠그다가는 나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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