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1129 두려워하지 말라 11.7.17(성령강림후5주)
마태 10:24-33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사람마다 다 똑 같지는 않다. 어린이는 부모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불경기를 두려워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가뭄과 홍수를 두려워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인생에는 두려운 일이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려운 것을 모를 정도로 교만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일 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에게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을 했다.
첫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둘째,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셋째, 자기 약점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넷째,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
다섯째,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여섯째, 말의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일곱째, 혼자있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365회나 말하고 있다.
오늘 성경에서는 세 가지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Ⅰ.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25절과 26절에서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1.비방을 받을 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사람들은 마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방을 했다. 바알세불이란 파리들의 왕이란 뜻으로 유대인들은 사단의 칭호로 사용했다.
예수님이 이런 비난을 들었으니 제자들은 그런 비난이나 그 보다 더한 비방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비방을 받을 때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신 것이다.
2.비방을 받을 때 진리가 승리할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실이 밝혀져 진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3.적극적인 복음 전파로 비방을 잊어버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27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적극적인 복음 전파를 가르치셨다. 그것은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두려움을 잊게 되고 또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기적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비방 같은 것은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무섭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무서워지기 때문에 적극적인 복음 전파를 명령하신 것이다.
Ⅱ.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주님은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핍박은 죽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이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형벌 즉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1.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프랑스의 철학자 벨그송은 “영혼은 육체란 못에 걸려 있는 모자와 같다. 못이 녹슬어 부러져 모자가 떨어지지만 집어 들면 그 모자는 그대로 있다”고 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영혼의 그릇인 몸은 낡거나 부서질 수 있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할 때 그가 오히려 자기를 돌로 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주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28절 하 반절에서 주님은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죤 녹스는 하나님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몸만 멸할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3.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 한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16이다. 그런데 두 앗사리온을 내면 참새 네 마리에 한 마리를 덤으로 준다. 그렇게 덤으로 팔리는 참새일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잡히거나 죽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머리털은 약 6만에서 10만개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도 아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도 세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상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니까 핍박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Ⅲ.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32-33절).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다.
왜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1.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믿음의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었다. 신변의 위협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구주되심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불신앙이다” 라는 말이 있다.
2.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복음 전파가 되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의 시작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에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찬송가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서 신문지로 싸서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복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복음 전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고전적인 전도방법이다.
3.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시인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목적은 하늘나라에 있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이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가 하늘나라에서 빛날 만큼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 살았지만 불순종으로 살아온 부분들이 함께 있어서 얼룩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때 주님은 그의 약속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했으면 주님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교훈과 적용
지금까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텔레비전을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 보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나 더 쉽게 무서움을 느낀다고 한다.
무서운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대한 면역이 생긴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 무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을 해야 된다.
주님을 따라가는 동안 두려움을 보지 않게 되고 그리고 주님 때문에 두려운 일도 우리를 피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한 남자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많은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희망을 갖지 마세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왜 하나님이 제게 1.6kg밖에 되지 않은 채 세 달이나 일찍 태어난 조산아 그것도 왼쪽 다리는 허벅지까지만 있고, 오른손은 기형이고, 폐에도 손상이 있는 이 아이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발 지금 이 아이를 데려 가지는 말아주십시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아기의 상태가 호전되어 몇 달 후에 퇴원을 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런 저런 수술을 위해서 병원을 들락날락 했다. 허벅지까지만 있는 아이의 다리가 자랄 때마다 뼈가 살을 뚫고 나와서 그것을 깎아야만 했다. 아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 아버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고 등을 돌렸다. 이렇게 15년 동안 그 사람은 술에 절어 살았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술을 마셨다. 아침이 되면 자기의 손이 부러져 있고,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보고서 간밤의 일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던 주일 아침 이 남자는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남편이며 아버지인가를 생각하다가 총을 꺼내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라디오가 켜져 있었는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지만 그것은 별 감동이 없었다. 그것은 전에도 많이 들어온 애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그 한 마디가 이 사람의 마음을 세차게 때렸다. 그 말은 그를 구원했다. 그는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만약 당신이 나의 미래를 주장하신다면 내가 사단의 손에 빠지기 전에 나를 이 비참한 삶에서 건져 내어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 남자의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의 동부지역 수학 경시대회에서 3등을 해서 주지사로부터 상장을 받고,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 세계지리 경시대회에서 우승했고, 지금은 고3인데 얼마나 많은 일로 그의 부모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그에게 주님은 그의 미래를 주장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미래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러나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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